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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살게 늦은 밤 골목길 모퉁이. 아직 간판도 없는 작은 공방에서 여자 둘이 뛰어나왔다. 머리를 질끈 묶은 키 작은 여자는 정말로 깡총깡총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밥 살게! 드디어 밥 살게! 너무 좋아!" 그렇게 두 여자가 어깨동무하고서 깡총깡총 뛰어가는데, 그 뒷모습이 어찌나 경쾌했는지. 나도 그만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더보기
어떤 짝사랑 유명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작가님께 데이트 신청을 했었다. 소소하지만 따뜻한 작가님 글이 너무 좋아서 결국 메일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작가님도 무척 반가워 해주셨고. 멀리 경상도에서 서울로 오시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주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이 바로 내일! 그런데 오늘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아... 아 저..."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하는 귀여운 목소리, 작가님이셨다. 갑자기 사정이 있어서 내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너무너무 아쉽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정들까지 조곤조곤 자세히 말씀하시는데 너무 귀여우셨다.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귀여우신 작가님. 아아. 난 귀여운 여자에게 무척 약한 것 같다. 그렇게 다음 주로 미뤄진 약속. 난 또 손꼽아 기다려야지. 한동안.. 더보기
감기 주간 감기가 지독하다. 며칠째 콜록거리는 건지 세어보니 오늘로 2주나 되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긴 감기 주간이다. 차도가 요즘 날씨처럼 좋았다가 나빴다가한다. 어제는 감기가 조금 가뿐해진 것 같아서 '이런 때 아예 끝장을 보자'는 각오로 병원에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약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걸어가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민규 씨 였다. 언젠가 한 번 출연했던 팟캐스트를 제작한 아는 사람 또는 동네 친구- 그런데 민규 씨 얼굴이 핼쑥하다. 작은 수술을 했다고 했다. 혼자 누워만 있으려니 그게 더 힘들어서, 볼일 겸 산책 겸 나왔단다. 쉴 새 없이 콜록대는 나와 움직일 때마다 통증 때문에 으으 소리를 내는 민규 씨. 우리의 대화는 이상했다. "콜록콜록, 민규 씨 괜찮아요? 콜록.""수리.. 더보기
그녀의 사람들 요즘 브런치에 이라는 글을 쓰고 있다. 타인의 기억을 내가 글로 재구성해서 기록해드리는 작업이다. 생각보다 독자들에게서 사연이 많이 온다. 대부분 마음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상처나 슬픔, 떠난 사람과의 행복했던 추억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고작 '작가'라는 타이틀 덕분에, 그분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공짜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 글들이 말이다. 작가라는 내 글보다 훨씬 더 가슴을 울린다. 보통 사람의 서툰 글자들이, 따옴표 안에 살아있는 진짜 말들이 너무 따뜻하고 또 아프다. 자꾸만 마음을 울린다. 방금도 막 도착한 어떤 독자분의 사연을 읽고선 대낮부터 주룩주룩 울고 있다. 참 주책맞은 작가다. 내가 감히 그분들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음이 행복하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서 눈물만 난다. 더보기
아빠 탓 막 해가 진 밤. 한 여자가 자전거를 끌고 지나갔다. 뒷자리에는 여자애 하나가 타고 있었다. 엄마와 딸인 것 같았다.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는데 끽끽, 하고 조그만 소리가 났다. 자세히 보니 뒷바퀴가 터져 있었다. 끽끽, 니네 아빠가 자전거 바람 넣는 거 깜빡했나 봐. 아우 힘들어. 그리고 씩씩, 엄마는 숨이 차는데. 여자애는 달랑달랑 발을 흔들며 사탕을 먹었다. 엄마의 뒷모습이 쉬지 않고 구시렁거렸다. 이게 다 아빠 탓이었다. 더보기
어느 날 목련꽃이 피었습니다 언니에게 언니, 나는 아파요. 폭력은 중독성이 강해요. 한 번, 두 번 그렇게 몇 번씩 계속되면 이상하게 무뎌져요. 애초의 공포는 두려움과 체념, 복종과 옹호로 변하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책하고 말아요.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결국 나는 벗어날 수 없어요. 한 번, 두 번. 그럼 이것도 꽤 참을 만해요. 거의 매일 밤, 유리가 깨지고 망치가 문에 박혔어요. 15층 베란다 너머로 컴퓨터가 떨어졌어요. 쿠웅 소리가 났죠. 그리고 구둣발이 날아들었어요. 멍이 들고 피가 떨어졌어요. 시퍼런 칼등을 웅크리고 막았을 때, 그는 나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어요. 귀가 먹먹해질 때까지 아니면 눈이 퉁퉁 부어 붙어버릴 때까지 울고 나면 그나마 괜찮아졌어요. 아침은 생각보다 일찍 왔고. 소란은 금방 조.. 더보기
멋진 이름 2 "이름이 뭐예요?" 내가 내 이름을 말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이름이 특이한 편이라서, 이름을 말해도 상대방이 한 번에 알아듣고 제대로 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고술희, 고술이, 고순이. 뭐, 이렇게들 받아적곤 한다. 고수리? 설마 이런 이름이 있겠어? 라는 미심쩍음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말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수리수리 마수리할때 고수리예요." 그럼 열에 아홉은 웃는다. 웃긴 이름인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웃겨서 좋다. 내 이름에 유머가 섞여 있어서 좋다. 슬쩍 웃고, 슬쩍 나를 마주보는 사람들에게, 재밌죠? 히히. 웃어줄 수 있어서 좋다. 웃음만큼 우리 사이를 말랑하게 만드는 좋은 마법은 없는 것 같다. 정말 무슨 마법 주문같은 이름이다. 수리수리 고수리. 멋.. 더보기
멋진 이름 1 커다란 병원에 갔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예약표를 기계로 뽑을 수 있었다. 게다가 초록색 양복을 입은 신사같은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셨다. 예약표를 뽑는데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보더니, "이야, 멋진 이름이네요! 부모님이 정말 멋진 이름을 지어주셨어!" "감사합니다." "멋진 이름 아가씨, 좋은 하루 보내요!" 웃으며 말씀하셨다. 앗, 심쿵! 이런 멋진 말투와 근사한 미소를 가진 신사 할아버지들이 나는 좋다. 더보기
바리스타 군 "따뜻한 라떼시죠?""네." 단골카페 카운터에 안내문이 붙어있었다.'카페 리모델링 관계로 4월 1일부터 4월 25일까지 문을 닫습니다.' "카페가 오래 쉬네요?""네. 한 달동안 리모델링 공사 할 거예요." "바리스타 군도 한 달 쉬시겠네요." "아뇨. 리모델링 하고 나면 점장님이랑 저랑 바뀔 거예요." "어머! 그럼 바리스타 군이 점장님이 되시는 거예요?" "아, 아뇨. 전 그만두고요. 점장님이 카페로 오실 거예요." "정말로 점장이 되신다면 좋으실텐데. 잘하실 것 같아요.""하하, 감사합니다. 따뜻한 라떼 나왔습니다." 아쉽네요. 그동안 친절한 미소와 맛있는 커피가 정말 감사했어요. 나는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쑥스러워서 그냥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돌아섰다. 단골카페 이름 모를 바리스타 군. 사실 .. 더보기
70원 망원 우체국에 갔다. 우편을 부칠 중형 종이봉투 하나 가격이 70원이었다. 가방과 지갑을 뒤져봤지만, 현금은커녕 백 원짜리 하나 없었다. "제가 현금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카드로...""봉투는 카드 결제가 안 돼요." "그럼 이 봉툿값을 이따가 우편 값이랑 같이 카드로...""봉투는 카드 결제가 안 돼요." "아... 그럼 어떡하죠? 우편 못 부치나요?""봉투는 그냥 쓰시고, 다음에 70원 꼭 가져다주세요." 몹시 단호했던 우체국 직원이 스르르 웃으며 말했다. 진지한 척 농담이었구나. 난 이게 뭐라고 그렇게 식은땀이 났을까. 관공서에만 가면 마치 시험 보는 학생처럼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우체국을 나오며 다짐했다. 다음에 70원 꼭 갚아야겠다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