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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부는 사람 갑자기 그녀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내가 갑자기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30년 넘게 휘파람을 불지 않았기 때문이지. 짜릿한 일이었어. 난 처음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나 했어. 난 위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아래층에 있었지.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날아든 새, 야생의 생기 넘치는 그 새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지저귀고 미끄러지고 되돌아오고 희롱하고 솟구치는 소리였어. 이윽고 내가 말했어. 당신이야? 당신이 휘파람 부는 거야? 응, 그녀가 대답했어. 나 아주 옛날에는 휘파람을 불었지. 지금 보니 아직 불 수 있었어. 그녀는 휘파람의 리듬에 맞추어 집 안을 돌아다녔어.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꿈치며 발목이며. 기분이며 욕망이며. 고통이며 장난기며. 분노.. 더보기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또는 작가의 시작 003 거룩한 소명 당신의 친구들이나 식구들은 당신이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하는 일을 "타이핑" 또는 "당신의 새로운 취미 생활" 정도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취미 생활이 아니다. 우표 수집이나 동전 모으기, 그런 게 취미 생활이다. 글쓰기는 소명이다. 024 진짜 작가란 내가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대 때이다. 당시 내겐 아기가 둘 있었다. 나는 식탁에서도 글을 썼고, 젖을 먹이면서도 글을 썼으며 침실의 낡은 화장대에 앉아 글을 썼고, 나중에는 작은 스포츠카 안에서 학교가 파하고 나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개들이 내게 침을 질질 흘릴 때에도 글을 썼고 고양이들이 내 원고에 먹은 것을 게우는 가운데에서도 글을 썼.. 더보기
죽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 마음산책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나는 알고 싶다. 죽은 뒤에도 미워하고픈 사람이 나타날까.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죽으면 용서하게 될까. 나도 죽으면 모두들 “좋은 사람이었지”라고 추억해줄까. 죽으면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테니 시시하다. 주변 사람들이, 내 주위의 세상이 스웨터를 뒤집은 듯 친절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거미가 되어 그물을 펼치고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서랍에 넣어둔 먼지투성이 물건에 때때로 볕을 쪼이는 것처럼, 나는 그녀 앞에서 심술궂은 마음을 펼쳐보인다. 그녀는 신이 내게 준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 팟, 하고 강렬한 빛이 내리쬐듯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분.. 더보기
사는 게 뭐라고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 마음산책 점심 무렵이 지나서 엄마 요양원에 갔다. 민머리에 모자를 쓰고 갔다. 엄마는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해서 엄마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는 내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있네." "엄마 남편은 사노 리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라는 건 뭘까. 설마 엉큼한 그것일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내가 큰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 더보기
우울한 해즈빈 우울한 해즈빈 저자 아사히나 아스카 지음 출판사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0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49회 군조 신인문학상 수상 소설! 학력 중심 사회에 배신당한... # 1 "'해즈빈(has been)'이란 말 아냐?" s 음절을 매끈한 무음으로 흘리는 구마자와의 영어 발음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다. "현재완료형 말이니?" "그래, 역시 도쿄대학 출신답군.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크게 한 건 올리는 사람을 해즈빈이라고 한다더라. 미스터 해즈빈(Mr. has been). 과거에는 한 이름 날리던 사람, 그리고 이제 한물간 사람." 구마자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손을 대면 스윽 미끄러져버릴 듯한 웃음이었다. # 2 밖에는 어스름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 더보기
이상의 러브레터 최근의 포스팅들이 의도치 않게 참 우울했다. 오늘은 달달한 이야기를 올린다. 시인 이상의 러브레터이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사진)이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보낸 친필 ‘러브레터’가 발견됐다. 앞서 그가 동료 작가 김기림과 안회남 등에게 쓴 10편의 편지가 공개된 적이 있으나, 이 같은 구애의 편지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편지는 이상이 25세이던 1935년 12월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열렬한 사랑을 보냈던 대상은 23세의 젊은 이혼녀였던 최정희(1912∼1990) 작가였다. 최 작가는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무대에서 활동했고, 귀국 후 삼천리,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는 등 당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신여성으로 이름을 날렸다. 시인 백석도 그에.. 더보기
초록색 작은 잎. 더보기
안나 클라렌 'Close to home' 'Holding' 연작만큼이나 좋아하는 'Close to home' 연작. 'Holding' 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면, 'Close to home'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같다. 안나 클라렌 홈페이지 : http://annaclaren.com/ 더보기
안나 클라렌 '홀딩(Holding)' 스웨덴의 사진작가 안나 클라렌(Anna Claren)의 연작 '홀딩(Holding)' 사이언 블루로 말하다 안나 클라렌에게 작업의 형식은 작업 동기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미지 언어로 이야기하는 작가에게 어떤 단어와 어법을 선택하는가는 무엇보다도 중대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사진집 'Holding'에서 일관되게 보여지는 전체적으로 푸른 화면의 조화와 투명해서 비칠 듯한 창백함은 안나 클라렌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계산된 어법이었다. 4개월 동안 매일 일기를 쓰듯 작업했다는 사진 연작 'Holding'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은 안나 클라렌이 주변에 늘 가까이 있는 인물과 사물로 바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때로 부모님, 할머니, 자매 그리고 어떤 동기를 통해.. 더보기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저자 은희경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2-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장르’이자 ‘브랜드’인 작가 은희경, 그... 지난달 사놓은 은희경 신작을 뒤늦게 읽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친필사인이 있었다. 'snow'라는 이름의 미니어처 향수도 뿌리고, 출근길 전철에서 눈송이를 읽어 내려가며. 나는 소외되고 결핍되고 순수한 것들이 좋다. 예를 들면 날카로운 첫 실연의 순간, 가로등 아래 떨어지던 눈송이를 맞으며 엉엉. 울면서 걸어가던 스물 두 살의 나처럼. 그렇다면 그땐, 떨어지는 눈송이가 되어 그대의 뒷모습을 위로하고 싶다. 당신이 지나간 바닥, 뚝. 뚝. 구멍 난 눈물 자국에 내려앉아 뜨겁게 사라질 눈송이가 되고 싶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