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죽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 마음산책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나는 알고 싶다. 죽은 뒤에도 미워하고픈 사람이 나타날까.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죽으면 용서하게 될까. 나도 죽으면 모두들 좋은 사람이었지라고 추억해줄까. 죽으면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테니 시시하다.

 


주변 사람들이, 내 주위의 세상이 스웨터를 뒤집은 듯 친절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거미가 되어 그물을 펼치고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서랍에 넣어둔 먼지투성이 물건에 때때로 볕을 쪼이는 것처럼, 나는 그녀 앞에서 심술궂은 마음을 펼쳐보인다.


 

그녀는 신이 내게 준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 팟, 하고 강렬한 빛이 내리쬐듯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분할 때만 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분해서 흘리는 눈물에는 상쾌함이 없다.

 


가난해도 좋다. 나는 품격과 긍지를 지닌 채 죽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모모 언니,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주고 싶어. 존경이나 은의(恩義)같은 걸 말이야.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세계는 점점 쓸쓸해진다.


 

15p

사노 씨, 죽는 거 무섭지 않아?”하고 몇 번이나 물어댔다.

싱글벙글 씨는 무서워?”

무서워.”

사는 게 훨씬 더 피곤하고 귀찮잖아.”

귀찮아도 죽는 건 무서워.”

아무래도 싱글벙글 씨는 저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사노 씨, 먼저 가서 내 자리 좀 마련해줘.”

죽어서까지 드러누워 뒹굴고 싶은 걸까.

괜찮은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바다가 보이고, 그 옆에 바위도 있고, 파도가 치는 곳.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곳. 유채꽃이 내내 활짝 피는 곳을 산책해도 좋겠다.”

그런 곳은 이 세상에도 있지 않은가.

알았어. 문자 보낼게.”

, 부탁해.”

죽을 날이 코앞에 다가오자, 죽으면 돈이 안 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방을 휙 둘러보니 전부 돈을 주고 산 물건뿐이다. 밥공기부터 옷장까지. 시야에 벽이 들어오자 집도 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물 받은 꽃이 어두운 장밋빛으로 신비롭게 피어나 있었다. 이 꽃도 누군가 산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껏 돈을 위해 일했다니.

쭉 가난해서 크로켓을 반씩만 먹었는데, 크로켓은 5엔이었다. 크로켓을 사러 갈 때 신었던 샌들도 돈을 주고 산 것이다.

일평생 돈을 얼마나 벌고 얼마나 썼는지를 생각해보니,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도 꺼림칙하고 무서웠다.

 

152p

갑자기 내 옆에 앉아 있던 목발 할머니가 그 백혈병 걸린 젊은 사람, 참 딱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호리 다쓰오의 소설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같은 두 사람이었다. 나는 3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투명한 필름처럼 몇 번쯤 나를 스쳐 지나간 젊은 커플을 몇 초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할머니의 말을 듣자 맹렬한 외로움이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어릴 적에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게 된 유리구슬 하나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을 때 느꼈던, 어쩔 도리 없는 쓸쓸함과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린 나의 작은 우주에서 소중한 물건이 사라질 때면 그 물건이 어딘가에 섞여 들었다가 다시 나온다거나, 오빠가 장난으로 훔쳐 간 것이라서 결국 호주머니에서 발견된다는 식의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작은 우주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소중한 물건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쓸쓸함이었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제는 결코 투명한 모습으로 고요히 내 앞을 스쳐 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단지 나를 스쳤던 사람이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 양 돌이킬 수 없는 쓸쓸함은 느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156p

진짜로, 이렇게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었다니까.”

목발 할머니는 스포츠 머리 아저씨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불행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이 사람이 사는 이유는 원망 때문이다. 원망의 뿌리를 잘라 내면 이 사람은 살지 못할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그것이 10년 뒤든 2개월 뒤든 원망과 찰싹 붙어 살아갈 것이다.

53년 동안!

이 사람은 강인한 걸까, 나약한 걸까. 아마도 강하거나 약한 차원이 아닌, 마음속 깊이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를 품은 사람일 테지.

내가 아는 건 그녀에게 그런 인생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고, 그녀가 보낸 53년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고통은 수술한 상처나 암세포에서뿐만 아니라, 53년간 얻는 마음의 상처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일생을 살아내었다. 위대한 업적이 아닌가.

별안간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 또한 원망과 분노의 개흙에서 전신이 갈가리 찢어발겨져 있다.

나도 내일 죽을지 10년 뒤에 죽을지 모른다. 내가 죽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잡초가 자라고 작은 꽃이 피며 비가 오고 태양이 빛날 것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고 양로원에서 아흔 넷의 미라 같은 노인이 죽는 매일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똥에 진흙을 섞은 듯 거무죽죽하고 독충 같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200p 옮긴이 이지수의 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이생에서 몇 번쯤은 사랑하는 존재의 소멸을 견뎌내야 할 것이고, 끝내는 스스로의 소멸도 견뎌야 할 것이다. 그 비길 데 없는 슬픔을 겪는 순간에, 자신의 죽음에 대담하고 초연했던 할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어쩌면 우리는 작지만 단단한 위안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 작은 위안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가능한 한 오래도록 빛을 발하기를 바란다.



+) 책 속에 좋은 글들이 너무나도 많다. 죽음에 대한 사노 요코 할머니의 솔직하고 또 솔직한 생각들이 마음을 울린다. 마지막 옮긴이의 말까지도 좋다. 아마 내 인생의 에세이가 될 것만 같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휘파람 부는 사람  (0) 2016.05.12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또는 작가의 시작  (0) 2016.05.12
사는 게 뭐라고  (0) 2016.05.12
우울한 해즈빈  (0) 2015.06.09
이상의 러브레터  (0) 2014.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