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이 옛날얘기를 해줬다.
1999년 12월 3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밤은 좀 특별했다. 다가올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해 제야의 종이 울리면 불꽃놀이를 한다고 했다.
작은 삼척시에서 뭐 그런 것도 했었나 싶었지만, 돌이켜보면 일출 포인트인 삼척 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 동네는 새해만큼은 항상 요란했던 것 같다.
게다가 2000년 밀레니엄이라니.
당시에 세상은 엄청나게 들썩거렸고, '밀레니엄'이라는 낯설고 세련된 외국어는 뭔가 국제적이고 대단한 기념일 같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흥분은 미지근하게 남아있다. 그러고보니 삼척시민들의 소망을 적은 돌멩이로 쌓아올린 소망의 탑도 2000년 밀레니엄 새해에 세워졌었다. 정말 특별한 날이었던 건 분명했다.
암튼, 그때 나는 불꽃놀이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밤에 혼자 옥상에 보러 나가는 건 무서우니까 동생에게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던 내 동생은 뒤도 안 돌아보고 싫다고 대꾸했다. 당시 우리는 14살, 12살. 철딱서니 없던 두 살 터울 남매로 뭐만 하면 아주 죽자고 싸우던 시기였다. 결국, 우리는 또 대판 싸웠다.
그날 밤, 밀레니엄을 알리는 제야의 종이 울렸다.
불꽃이 펑펑 터졌고 나는 방구석에 앉아 펑펑 울었다. 동생은 그때까지도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누나, 난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나. 누나가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띵띵 부었었어. 미안하긴 했는데 미안하다고 말을 못했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나 철이 없었던 거 같아. 내가 정말 성격이 좀 그래서 특별한 날에는 꼭 가족들이랑 싸우는 거 같기도 하고.
누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계속 후회가 돼. 난 그날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누나."
동생은 그렇게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나는 그날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나 특별한 날에 벌어진 일이라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나는 그날 불꽃놀이를 했는지 조차도 가물가물하다. 동생은 미안한 맘에 그 기억이 생생하다는데, 난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니 동생만 억울할 노릇이다.
생각해봤다. 보통 누군가가 내게 서운하게 굴었던 기억은 오래 남는다.
못된 친구, 몹쓸 어른, 이름도 모를 짜증 나는 사람들. 그들이 내게 준 서운함과 상처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서운함을 안겨준 일들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사람들. 노상 후회만 하고, 늘 미안한 마음만 드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상처받은 것 보다, 내가 상처 준 것들만 기억나고 내내 후회만 남는 사람들.
그렇다고 따로 사과하기도 뭣하고, 내 맘과는 달리 또 까먹고 다시 서운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족인 것 같다.
나는 동생에게 그런 거로 괜히 가슴 쓸쓸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동생의 뒤늦은 고백이 멋쩍기도 했고, 그날 밤, 왜 우리 남매 둘만 집에 남아있었는지.
그 시기 어둡고 위태로웠던 집안 분위기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따지자면 특별한 날의 기억이 남아 있으니 좋은 거라고.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우린 아마 피 터지게 싸웠을 거라고.
그래도 함께 있어서 외롭진 않았다고.
가족이니까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응답하라 1999.
불꽃이 펑펑 터지던 우리 남매의 그날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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