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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둣방

언젠가 동네 구둣방에 들렀다. 싸구려 구두는 금세 뒷굽이 닳아버렸다. 튀어나온 못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콩콩 찧었다.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요란해, 부끄러울 지경이 되어서야 아가씨는 구둣방을 찾았다. 머리가 벗겨진 구둣방 아저씨는 예순은 훌쩍 넘으신 듯 보였다. 청년 못지않은 굵은 팔뚝으로 연장을 들었다. 

 

"이거 봐요. 허술한 거 보여요? 요새 구두들은 만듦새가 무슨 종이 구두라니까. 쯔쯔."  

"아, 전 제가 하도 험하게 신는 건가 했어요."

"아니야. 이렇게 대충 구두를 만들면 쓰나. 혹시라도 걷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아저씨는 일에 자부심이 넘쳤다. 구둣방 일로 자식들 대학도 보내고, 큰딸은 올해 결혼한다고 했다. 허허. 아가씨는 내 딸 같구먼. 나중에 비싸고 튼튼한 구두 사주는 놈이랑 결혼하드라고.  

노련한 손놀림으로 뚝딱. 쓱싹. 아저씨는 허허. 연신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누군가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아가씨, 꽃향기 안나요?"

그러고 보니, 좋은 향기가 가득하다. 아저씨는 곁눈질로 창문을 가리켰다. 자세히 살펴보니, 조그만 구둣방은 옹기종기 화분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놈이야. 향기가 백 리를 간대서 백리향이에요."

꽃을 보고 저 놈이라 부르는 투박한 말투가 정다웠다. 뒷굽을 갈고 난 후, 때 빼고 광내는 애프터 서비스도 잊지 않으셨다. 뒷굽갈이 한 짝에 3천원. 나는 6천 원으로 말끔해진 새 구두를 신고 구둣방을 나섰다. 향기로운 기억이었다.  

 

싸구려 구두만 사 신던 아가씨는 이젠 구두도 잘 신지 않으니 그곳에 들를 일이 자주 없다. 하지만 종종 그 구둣방을 지날 때면, 사계절 꽃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요즘은 장사가 예전만치 않으신가 보다. 오랜만에 구둣방을 지났다. 홀로 테레비를 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창틈으로 보인다. 백리향은 아닌, 이름 모를 꽃향기가 은은하다. 마치 꽃으로 둘러싸인 아저씨의 요새 같다. 세상 풍파도 이 조그만 방에서 버텼지. 허허. 

 

'금이빨 삽니다.'

구둣방에 내걸린 조악한 글씨에,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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