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
언니, 나는 아파요.
폭력은 중독성이 강해요. 한 번, 두 번 그렇게 몇 번씩 계속되면 이상하게 무뎌져요. 애초의 공포는 두려움과 체념, 복종과 옹호로 변하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책하고 말아요.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결국 나는 벗어날 수 없어요. 한 번, 두 번. 그럼 이것도 꽤 참을 만해요.
거의 매일 밤, 유리가 깨지고 망치가 문에 박혔어요. 15층 베란다 너머로 컴퓨터가 떨어졌어요. 쿠웅 소리가 났죠. 그리고 구둣발이 날아들었어요. 멍이 들고 피가 떨어졌어요. 시퍼런 칼등을 웅크리고 막았을 때, 그는 나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어요.
귀가 먹먹해질 때까지 아니면 눈이 퉁퉁 부어 붙어버릴 때까지 울고 나면 그나마 괜찮아졌어요. 아침은 생각보다 일찍 왔고. 소란은 금방 조용해졌으며. 모든 건 금방 잊혀졌어요. 모두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죠. 어른들은 점잖았어요. 없었던 일이었어요. 나는 비로소 찾아온 빛 속에서 꾸벅꾸벅 졸았어요.
나는 그때부터 대답하지 않았어요. 어서 대답하라고 뺨을 때려도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떨었어요. 그랬어요. 나는 조용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가끔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가끔, 15층에서 탄 엘리베이터가 그대로 추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냥 다 그 안에 갇힌 채로 사고로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언니, 폭력의 기억은 절대 잊히지 않아요.
기억하기 싫은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는 편리한 머리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유독 기억력이 좋은 나는, 믿을진 모르겠지만. 두 살 때 기억도 또렷해요. 그 역시도 폭력의 기억이죠.
언니, 나는 모든 공포와 분노를 머리로 쑥쑥 흡수했어요. 모든 것은 내 탓이었어요. 내가 맞는 것도,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도, 내가 대항하지 못하는 것도,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도 모두 다 내 탓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잘못한 일들을 세어보았어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고 또 셌죠. 내 잘못을 모두 고치려고 나는 정말로 애를 썼어요. 잠들어서조차 나는 매일 악몽을 꾸고 잘못했다고 빌었어요.
그러니 나는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해요. 오히려 정신이 올바르고 순수한 게 이상한 거죠. 나는 밝을 리가 없어요. 긍정적일 리가 없어요. 그럴 리 없어요. 그래도 언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사실 이렇게 아프다는 사실을 꽁꽁 숨겼어요. 밤새 울고서 학교에 가도 나는 잘 웃고 친절한 모범생이었죠. 다행히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순간, 이를테면 고등학교 때 말다툼을 하던 친구에게 ‘씨발년’ 이 한마디를 듣고선 무너졌어요. 나는 충격을 받고 온종일 울었어요. 내가 겨우 씨발년이라니. 왜, 어째서요.
언니, 한때는 말예요. 이 기억들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를 뛰어 넘어서야만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난 자존심을 세우고 희망을 가졌어요.
하지만 언니, 나는 유독 끔찍한 뿌리에서 자랐어요. 가난과 폭력의 뿌리는 죽여도 죽여도 다시 자라고, 더 깊이 뿌리를 내렸죠. 그리고 주변의 활기찬 초록까지 병들게 했어요. 진짜 나를 보여준 순간, 사람들은 시들해지고 우울해지고 나를 피하고 짜증 내고 그렇게 죽어갔어요.
억울해요, 언니. 나는 정말로 화사한 주변 사람들까지 시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게 학대받으며 자랐지만, 누군갈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요, 언니. 왜 내가 다가가면 다들 죽어버리는 건가요?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가요?
언니, 누군가는 그랬어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세상에 깔렸고,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훨씬 많다고 그러니까 힘내라고 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나보다 가진 사람이 더더더 많고,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더더더 많았어요. 나는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머리도 없었고, 특출하게 뛰어난 재능도 없었고, 아빠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빽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고, 운도 없었고, 자신감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게 내 구질한 현실이었어요.
그래도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의 상처는 되풀이되고 다시 재현돼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결국엔 내가 살 수 있는 최후의 장소는 없고, 나를 이해하고 기꺼이 나의 기억을 부담할 사람도 없어요.
내가 머물 수 있는 최후의 장소가 그곳이 아니라면. 내가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그이가 아니라면. 믿었는데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래도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기대해도 단단한 고리처럼 반복된다는 걸. 그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면.
언니, 대체 나는 어디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걸까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살아야 하나. 그렇게 때리고 짓밟을 거였다면, 애초에 나는 왜 태어났을까. 오늘 나는 궁금했어요. 하지만 어떠한 답도 생각해내지 못했어요.
너에게
기억하니?
아무도 모르게 네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작은 도시.
그 도시는 봄이 되면 도시 전체가 새하얗게 변했어. 낮은 산과 양지바른 골목, 거리마다 온통 새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어. 하굣길, 그 길을 걷다 보면 너는 꿈을 꾸는 듯 아득해졌지. 바람이 불었고, 네 머리 위로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리는 벚꽃엔딩이 펼쳐졌어. 봄에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작별이었지. 내리쬐는 봄볕과 흩날리는 벚꽃과 몽롱한 졸음에 너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어.
봄꽃은 벚꽃뿐이 아니었어. 네가 살던 아파트 화단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 꿈결 같은 벚꽃 길에 취해 집 앞에 도착하면, 그곳에는 목련꽃이 피어있었어. 순백의 목련꽃. 하지만 너는 얼굴을 찌푸렸어.
넌 꽃보다 바닥을 먼저 보았거든. 늘어질 듯 매달린 무거운 꽃잎들이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어. 바닥엔 검게 변한 꽃잎들이 짓물러 뒹굴고 있었지. 죽는 모습을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꽃이 또 있을까. 너에게 목련꽃은 산 꽃이 아니라 죽은 꽃이었어. 어쩌면 너는 좀 유별난 애였을지도 몰라. 꽃이 피는 모습보다 지는 모습을 더 자세히 보았거든. 그래서일 거야. 너는 벚꽃은 좋아했지만, 목련은 싫어했어. 나도 그랬어. 어른이 되고서도 유일하게 싫어하던 꽃이 바로 목련꽃이었으니까.
하지만 목련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어. 나무 한가득 송이송이 피어난 순백의 꽃이 아름답다고 했지.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난 순백의 목련꽃은 좋아하지만, 지저분하게 떨어져 짓무른 꽃잎은 싫어해. 바닥에 떨어진 목련꽃잎이 짓무르고 썩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밑바닥을 바라보지 않아. 그 위에 핀 우아한 목련만 바라볼 뿐이야. 바닥이 깨끗해질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도,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그 위를 바라볼 뿐이야. 사람들은 아프고 더럽고 추악하고 슬픈 것들을 싫어해. 그래서 무시해. 우리가 마주하는 아름다움의 이면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 버리지.
그래서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어. 끔찍하고 추악하고 또 너무나 적나라했거든. 사람들은 착하고 밝은 너를 좋아했지만, 네 밑바닥을 바라보는 건 부담스러워 했어. 정작 네 상처는 그곳에서 문드러져 썩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몰랐어. 아니, 모른 체했을 거야.
네가 나에게 편지를 썼을 때, 너는 창문 없는 고시원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스물세 살 여자애였어. 나는 너를 기억해. 그때, 넌 연인에게 상처받고 울고 있었어. 자꾸만 악몽을 꾸고, 어두운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너에게 연인은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지.
“이제 그만해. 잊을 때도 되지 않았어? 너 좀 이상한 것 같아.”
넌 그 말에 입을 다물었어. 그리고 작은 방에 스스로 갇혔지. 너는 자책했어. ‘나는 왜 지난 일들을 하나도 잊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이런 한 마디에도 무너지는 상처투성이일까.’ 그때 겨우 네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울먹이며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뿐이었어. 그때. 네가 훌쩍 자라 지금의 나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럼, 나는 무심한 연인에게 대꾸했을 거야.
“나는 이상한 게 아니야. 잊지 못하는 건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거야.”
괜찮을 수 없고, 잊을 수 없고, 아플 수밖에 없었던 너의 상처. 그럴 수밖에 없는 상처의 지긋지긋함. 불행히도 너는 스물여섯 살에도, 스물여덟 살에도, 서른 살에도 여전히 가슴 맨 밑바닥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고 있어.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불현듯, 그 상처는 너를 콕콕 찔러 대. 잊지 마, 나 아직 여기 있어. 이젠 질려버릴 대로 질려서 말 붙이기도 싫은데, 지긋지긋하게도 붙어있는 그 상처. 그렇게 눈치 없이 안부 인사를 건네곤 해. 그래. 어떻게든 떼어낼 수가 없더라.
스물셋의 너는 나에게 편지를 쓰고선 얼마 후, 네게 상처를 주었던 연인과 헤어졌어. 너는 먹먹한 가슴으로 혼자 거리를 걸었지. 횡단보도를 건너고 골목을 지나고 오래된 연립주택의 담장 길을 걸었어. 그때였어. 너는 죽어가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어. 앙상한 가지가 담장 너머로 뻗어 나와 있었지. 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너는 알았어. 나무는 살아있었어. 앙상한 가지에 마른 이파리조차 하나 없는데, 가지 끝에는 뽀얀 봉오리가 달려 있었어. 잎도 없이 번데기 같은 꽃봉오리만 매달린 나무. 무슨 나무일까. 너는 궁금했어.
며칠 뒤, 비가 내렸어. 너는 우산을 쓰고 다시 그 길을 걸었지. 그러다 문득, 너는 제자리에 멈춰 섰어. 토독토독. 우산 속에 빗소리가 가득했어. 그리고 나무에는 하얀 꽃이 피어있었어. 하얀 목련꽃. 너는 처음으로 그 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아름답지 않은 것들. 어쩌면 너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아름답지 않은 것들만 바라보았던 걸지도 몰라. 그 이면의 아름다움에는 고개를 돌린 채 외면했던 건지도 몰라. 뒤늦게야 알게 된 그곳에는 아름다움이 있었어.
알고 있었니? 목련은 늦가을 즈음에 꽃봉오리를 맺고, 가지 끝에 꽃봉오리를 매단 채 추운 겨울을 보내. 그렇게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봄이 오면 꽃잎을 열고 하얗게 피어나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지. 모든 꽃이 햇볕 따뜻한 남쪽을 바라보고 피어날 동안, 목련꽃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북쪽을 바라보고 피어나. 오직 목련꽃만 그래. 네가 싫어했던 목련꽃은 충분히 아름다운 꽃이었어. 목련꽃은 죽은 꽃이 아니라 산 꽃이었어. 끈질기게 살아가는 꽃.
나는 네가 목련꽃 같다고 생각했어.
불행히도 상처는 끈질겨. 사계절 네 곁에 머물 거야. 아마도 평생, 네가 죽을 때까지 네 안에 살아 있을 거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너는 상처를 껴안은 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겠지. 그래서 매년, 너는 가지 끝에 매달려 옹송그린 채 혹독한 겨울을 보낼 거야.
하지만 봄이 와. 어쨌든 봄은 와. 너는 매년, 새봄을 맞이할 거야. 그때마다 너는 피어날 거야. 너를 춥고도 아프게 했던 불행의 방향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 북쪽을 바라보며 너는 피어날 거야. 세상엔 그런 꽃도 있는 거야. 그런 목련꽃에겐 새하얀, 순백의, 우아한, 탐스러운 같은 수식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그냥 하얀 목련꽃 그거면 돼.
그렇게나 싫어했는데, 나는 이제 목련꽃에 눈길이 머물 것 같아. 툭툭,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수북이 쌓인 거뭇한 꽃잎들을 보면서, 나는 너를 생각할 거야.
바닥에 떨어진 네 상처는 짓무르고 썩어 너의 밑바닥으로 사라질 거야. 유독 끔찍한 너의 뿌리로. 네가 말했던 과거의 공포와 분노, 거기에 아프고 더럽고 추악하고 슬픈 기억들까지 더해진 상처들. 네 뿌리는 그것들을 쑥쑥 흡수하고선 꽃을 피울 준비를 할 거야. 그 시간이 참 오래도 걸리겠지만 너는 늘 그랬듯 잘 견뎌낼 거야. 가만히 옹송그린 채, 위태롭게 매달려 겨울을 견뎌낼 거야.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냥 태어난 그대로 상처 입고 피어날 뿐이야. 유독 끔찍한 뿌리에서 자라 그렇게 맞고 짓밟혔지만, 그저 조용히 견뎌낸 너는 언제나 활짝 피어난단다.
잎보다도 먼저, 너를 괴롭힌 불행의 방향을 향해, 찬바람을 맞닥뜨리며 꼿꼿하게.
금방 질 것을 알고도 흐드러지게 피는 하얀 목련꽃처럼.
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야.
나는 말이야. 그런 네가 아름다워.
너는 눈물겹게 아름답단다.
서른 하나의 내가 스물 셋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도 힘들어 하고 있을,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